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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의료/구호 봉사 다녀왔습니다.

작성일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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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방문 일지 2005년 1월 16일(일) - 20일(목) 1월 16일 오후 4시. 65세의 건강한 아주머니 간호사(?), 그리고 남자 두명과 대학 졸업반 여학생 한명. 모두 긴장된 마음으로 스리랑카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싱가폴을 거쳐 열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보내고 밤 한시에야 목적지 아름다운 땅이라는 이름의 나라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습니다. 콜롬보 공항에는 각국에서 온 지원단, 취재진... 보통 때와는 다른 구성의 방문객들이었습니다. 현지 공항은 70년대 초 중동 진출이 많았던 김포공항의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과 현지 실정을 보는 듯하여 마음 한편이 아팠습니다. 사랑밭에서 지원하기로 한 미국의 의료진은 예정보다 약간 연착되어 두시경에야 함께 만나 비행장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마취과, 한의사, 간호사, 의료 업무 보조, 일반 사무 행정 담당 등 L.A.에서 떠나온 일행은 16명이었습니다. L.A.에서 서울까지의 12시간 비행과 인천 공항에서 열시간 대기. 방콕, 콜롬보.. 총 30시간이 넘는 멀고도 험한 비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이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들이었습니다. 새벽 두시가 넘어 현지에서 모두 함께한 일행은 콜롬보에서 따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바로 골이라는 곳으로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아침에 현지에 도착해서 잠깐 쉬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기로 한 것입니다. 다들 하루를 꼬박 뜬 눈으로 지샜지만 불평 없이 밝은 표정들로 받아들이며 골로 향하였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비교적 큰 도시인 골로 가는 길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평상시보다 두시간 정도 더 걸리는 네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습니다. 그나마 한동안은 폐쇄되기도 하고 또 복구되는 과정에 일곱 시간이 넘는 길이었지만 미군들이 도로를 덮고 있는 파괴된 건물 잔해들을 치워서 이만큼 빨라진 형편이었습니다. 지진해일로 도로 옆의 건물들이 무너지며 온통 도로를 뒤덮어 도로 자체가 통행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항에서 한시간 정도 지나서부터는 큰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왕복 2차선으로 한국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의 모습이 비슷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골로 가는 네시간... 해안 도로에는 무너진 집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아예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동네가 사라진 곳도 많이 보였습니다. 가끔은 어두움 사이로 집 위에 올라 타고 있는 배들도 보였습니다. 군데군데 2층의 건물임에도 유리창이 깨지고 2층 한쪽이 부숴진 곳들도 많았습니다. 이 지역을 덮친 해일의 규모와 강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리랑카는 1800만명의 인구로 구성된 국가로 싱갈라 족과 타밀 족이라는 두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싱갈라 족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99.5% 불교도이며 타밀족은 소수 민족으로 여러 면에서 탄압을 심하게 받고 있는 편이어서 민족간의 갈등이 반군이 구성되고 스리랑카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위치한 반군은 그 수가 200만명에 다다릅니다. 정부군은 월급에 의존하는 직업적인 성격을 띠는 한편 반군은 목숨을 걸고 반항하고 또 현지 열대 밀림 등의 지형적인 상황으로 반군 진압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타밀족은 70가 힌두교이고 30%는 기독교로 양민족은 인도 중부 지역과 인도 남부 지역에 스리랑카로 정착하여 종교와 구성이 전혀 다른 형태였습니다. 450년간 네덜란드 포루투갈,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마치고 1945년 독립하기 전까지는 민족간의 갈등이 심하지 않았지만 정치인들이 불교 세력과 연합하여 타밀족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2년전 양 민족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수시 때때로 폭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통행금지로 하루 2시간만 밖에 나갈 수 있었던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불교지도자에게 정식으로 인가 형태의 인사가 있기 전까지는 실권을 얻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현재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이곳에도 남아 있어 사회 발전에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승려의 위치는 중상층 이상만 승려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상급 계층을 차지하며 버스 안에 승려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 지위가 인정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미신이 지나치게 팽배하여 연초에는 절에서 밥하는 시간과 불 땔 시간까지 지정해 주는 형태의 종교 형태로 바뀌어 국가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마약 중독으로 인한 사회 문제는 심각한 상황으로 전체 인구 10% 정도인 200만명이 마약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특히 고학력자가 마약에 관계되어 실형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중, 고등학교 인근의 가게들 가운데 마약을 투여한 음식물을 파는 경우들이 종종 있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마약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번 지진 해일은 스리랑카 북부에서 동부 지역에 이르는 25% 정도의 해안지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지역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골지역에만 6천명 이상의 사망과 함께 실종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은 상황입니다. 재산 피해는 겉에서 보기에만도 집계가 어려울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안타까운 상황은 해일로 양부모를 잃은 아이들만 1500명인데 이들은 부모가 없어서 난민촌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인근 지역에 인신매매로 팔려 나가는 경우도 있어 듣는 마음에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스리랑카 자장가 중에는 가사 중에 ‘잘자라 잘자라 우리 아가... 자지 않으면 아기 파는 사람이 술먹고 와서 잡아간다...’는 내용이 불려질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아이들의 인신매매에 대한 아픔들이 깊게 배어있습니다. 인근 섬 지방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동력이 없는 배에 가두고 평생 일을 부려먹는 형태의 일들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1. 첫째 날 16일 오후에 떠나 17일 새벽 여섯시 경에야 목적지에 쉼 없이 달려온 봉사단은 오전에 잠시 쉰 후에 골 지역의 작은 도서관을 찾아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멀고 먼 길을 찾아온 의료진들은 이날 각 과별로 나누어 진료를 행하였는데 오후 여섯시 가량까지 모두 1000명 정도에게 진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1년간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던 할아버지가 한의 치료를 받고 걸어 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료센터를 방문한 인근지역 환자들은 대부분 가족 중에 피해자가 있었으며 진료센터 인근 지역도 해일로 인하여 많은 가옥들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이번 지진해일은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지진으로 인하여 발생한 해일로 스리랑카와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그리고 멀리 아프리카의 케냐에까지 피해를 주고 현재까지 16만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해일 피해는 시속 400키로 이상의 속도로 5-6미터의 물이 들이닥쳐 한국의 목포에서 강릉시까지 정도의 해안을 200미터-1키로미터 정도까지 침투하여 극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첫째날의 진료를 마친 봉사단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현지에서 선교 활동 중인 최재영 선교사로부터 스리랑카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사항들을 들으며 함께 아픔을 나누고 이번 봉사 기간동안 이루어질 봉사 형태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틀 동안을 제대로 자지 못한 봉사단은 골에서 드디어 첫째날 밤을 달콤하게 보내고 이튿날을 맞았습니다. 2. 둘째 날 둘째날은 골 지역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하여 현지 수감인들을 대상으로 진료 및 치료를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골 지역 교도소에는 약 천명의 수감자가 있으나 위생 상태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 지역에 비하면 정해진 여러 가지 규정들로 인하여 그래도 나은 편이었습니다. 스리랑카는 한국에서처럼 경찰서 유치장의 개념 없이 일단 모든 피의자는 교도소에 들어오도록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날 교도소에는 한국에서 온 한국기독교 연합 봉사단과 한민족복지재단 봉사단이 함께 방문하여 감방 소독을 실시하여 주고 있었으며 교도소에서는 이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감방에는 많은 벌레들과 쥐들이 나와 소독을 보는 이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재소자 중에는 특히 마약과 관련된 재소자가 많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전에는 남자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실시하고 오후에는 여자 수감자들과 인근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실시하였으며 봉사단 일부는 인근 피해 지역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해일로 물에 잠긴 해군 함정들과 파괴된 수산물 도매시장, 그리고 55채의 가옥 중 벽채만 간신히 두 채만 남은 동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220명의 주민이 있었으나 72명이 죽었다고 동네 입구에 기록한 곳도 있었으며 학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학교 정문 기둥만 남고 아무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방문한 곳 중에 한곳은 기찻길이 파손된 지역이었는데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원래의 길에서 저만치 밀려간 곳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해일로 인한 피해 중 달리던 열차가 해일에 떠밀려 나가 인도에서 발견된 경우도 있다고 하여 해일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지역은 지진 해일로 건물 전체가 기울어져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도로 곳곳에 난민 텐트촌이 있었는데 유엔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지원된 텐트를 이용하여 머무르고 있었으며 음식물 공급 등 많은 어려움들이 전국에 동시에 밀려닥쳐 경제규모나 인구면에서 크지 않는 국가의 정부로서 처리에 어려움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능하였습니다. 지역의 대부분 도로를 덮고 있는 돌과 벽채 등을 미군의 지원으로 처리한 후에야 통행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6.25 전쟁 때 한국을 지원했던 국가가 지금은 오히려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경제 규모로 어려움을 겪으며 오히려 한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이에 대하여 깊은 감사와 함께 6.25 때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코리아사람처럼 살라고 하면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라는 뜻으로 통했던 것이 요즘은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지진해일 피해 지역을 방문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봉사단과 합류하여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저녁 식사 후 낮에 있었던 일들과 하루 빨리 이 나라의 아픔이 치유되고 종족간의 갈등 없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함으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3. 셋째 날 셋째 날 아침이 밝고 봉사단은 모두 함께 아침에는 난민촌을 방문하여 의료 사역을 행하기로 하였는데 아침에 그 지역에서 진료 받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재난으로 인하여 민심이 나빠져서 물품을 나누어 주는 과정 중에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전에 물품을 받을 번호표를 정해진 수만큼 나누어 주고 그 물품을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나누어 주지 않으면 이에 대한 반감으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한사람을 무시하는 경우 이에 대한 반감은 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전 중에 각자 정비를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점심 식사를 일찍 마치고 인근 지역의 사원(절)에서 진료를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골 지역은 스리랑카 주종족인 싱갈라족이 대부분으로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전파 사역을 하고 있으나 어려움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절에서 기독교 기관을 통하여 연결된 사람들이 진료행위를 하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어려워 예전과는 다른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는 20여명의 기독교 교역자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와 있으며 400여명의 교민이 있는데 주로 콜롬보 지역에 위치하는 한국 기업 직원 및 가족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원의 형태는 한국의 절과는 다른 기후만큼 전혀 다른 형태였습니다. 사원에 머물고 있는 승려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인근 지역 또한 많은 건물들이 파손되고 길가에는 곳곳에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세시간 정도 진료를 하고 난 후 봉사단은 골지역에서 수도 쪽으로 20분 가량 떨어진 피해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달리던 기차가 달리던 중에 해일로 인하여 피해를 입고 3-4백명의 승객이 피해를 당한 지역으로 기차를 그대로 세워 놓았는데 그 망가진 형태로 그 강도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봉사단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한국의 국회의원 조사단이 이 지역을 돌아보고 있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국의 대표들을 만날 수 있고 또 스리랑카를 방문한 국회의원 대표단(정의영 의원, 이해훈 의원, 노해찬 의원, 김명자 의원)으로는 두 번째라는 이야기와 스리랑카가 한국의 지원에 대하여 매우 감사해 한다는 이야기에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해 지역을 둘러보며 그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 다시 한번 돌아보며 모두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피해를 당한 기차를 돌아보고 인근 지역의 한 건물에서 한국봉사단에서 구호품 전달하는 곳을 방문하여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구호물품은 쌀 두되, 콩 한 되, 라면 5봉, 과자 5봉, 물 1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품을 받기 위해 현지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때로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모습에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의 우리네 부모들의 모습도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약 400명의 주민들에게 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며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여러 교회에서 참여하여 골 지역의 많은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방역과 구호물품 지원 그리고 복구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리고 이 나라의 국민들이 그 일에 한국을 다시 돌아보고 또 고맙게 느끼는 모습에 함께 어려움을 나눈다는 것은 결국은 그에 따르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4. 넷째 날 ... 어느새 넷째 날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짧게 예배를 드리고 또 새로운 하루를 감사함으로 시작하며 이 땅에 있는 아픔들을 함께 나누며 일과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날은 이 지역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가방과 공책 등의 구호물품 전달과 함께 의료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함께 떠난 미국의료봉사단과 한국에서 온 다른 봉사단(한국기독교 연합 봉사단, 한민족복지재단)도 이 날 쌀, 라면 등 구호물품을 전달하기도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여 있었습니다. 마당 한편에서는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또 학교 건물 한편에서는 의료 진료를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들에게 풍선으로 강아지 같은 것들을 만들어 주며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고 아픔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랑밭에서는 이번에 미국 진료 봉사단의 의료 봉사에 참여하여 스리랑카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지원하였지만 이제 처음 하는 제3세계 사역이고 또 짧은 시간에 일이 이루어져 많은 지원을 하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일부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많은 의사, 기업, 또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주체적으로 더 많은 지구촌의 이웃들에게 다가서고자 합니다. 스리랑카 뿐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많은 나라들이 스리랑카와 같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을 돌보는 것은 길게 본다면 결코 나의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스리랑카의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또 후에 한국, 한국인, 한국 상품에 대한 인식이 바뀜으로 우리에게 돌려줄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입니다. 또 그들이 새롭게 일어서고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촌. 언젠가부터 쓰게 된 이 말은 결코 우리가 멀리 있지 않으며 또 남이 아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피해를 입은 여러 나라들의 아픔을 위하여 그들이 하루 속히 회복되고 우리 모두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사랑밭에서는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케냐.. 저들을 도우실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품이나, 의류, 침구류, 생필품 등 물품으로 혹은 후원금으로 도우실 분들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5. 다섯째 날 이날은 의료봉사 지원 마지막 날... 한편으론 이제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 되었음이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좀 더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과 한편으론 그들과 진정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는가 하는 자문에 어떤 대답도 찾지 못하여 안타까웠습니다. 이 날은 아침부터 떠날 짐을 정리하고 오전에 3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에서 세시간 정도 진료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와 짐을 찾아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늘 바닷가에 오가면서 평지만 보다가 이날은 내륙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리랑카의 내륙은 산도 많았고 또 언덕에..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논도 있었고 산언덕 너머로 차를 재배하는 곳도 많았습니다. 이 날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스리랑카에는 바다와 평지만 있다고 큰소리칠 뻔 했습니다. 산이 있는 관계로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은 지진해일과는 관계없이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 또한 해변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바나나 나무와 야자 나무... 지진해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잘 자라고 있는 나무 열매들을 보며 혹시나 내 모습은 아닌지 무거운 마음이었습니다. 방문한 교회는 우리나라 교회로 치면 40명 정도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었고 어린 아이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곳처럼 모두 맑고 밝아 보였습니다. 진료를 시작하기 전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또 미국한인의료진이 선물한 전자 올갠 소리에 맞추어 마음을 열고 노래를 부르고 진료가 시작되었으며 밖에서는 아이들에게 풍선으로 강아지며 꽃이며 만들어 주었습니다. 산동네여서 이 지역에는 과일 나무도 많았고 또 어떤 나무 아래에서는 손가락 한두마디 크기의 갈색 과일도 주울 수 있었습니다. 스리랑카 산지에는 뱀이 많다고 하는데 종류가 세계에서 제일 많고 독사도 많지만 뱀을 잡지 않아 사망 사고가 많이 발생할뿐더러 그 수가 자동차 사고 사망자 수를 초과한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의 산지 지역에서는 주로 차재배를 많이 하는데 차밭 중간 중간에 습도와 적당한 일조량을 조절하기 위하여 나무들을 심어놓은 것이 특이했습니다. 멀리까지도 산마다 차를 심어놓았는데 스리랑카에서 생산하는 차의 양이 세계 3위로 세계 시장의 25%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는 식민지 시절부터 지배 국가들이 스리랑카에서 이를 장려하고 이를 수확하는 형식을 취하여 지금도 차를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고무는 세계 4위 생산을 자랑하지만 차와 고무의 국제가격이 하향 추세에 있어 경제적 전망은 밝지 못한 편입니다. 식민지로 지배하면서도 이 나라에서의 경제적 약탈을 위하여 산과 지역마다 길과 철도가 연결하였지만 실제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계몽적인 사상이나 윤리, 철학 등의 교육은 철저히 배재하여 현재의 스리랑카 국민들은 애국심이 약하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거나 경제적인 여건이 되면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아 정작 이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 요원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에 머물며 정작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옷들을 잘 입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간의 이야기로는 일년 내내 계절의 변화가 없어서 변화를 주려면 옷을 다양하게 바꿔 입는 것이기 때문에 자주 그렇게 바꿔입는다고 하지만 돈이 생기면 옷을 가장 먼저 사입어 옷 장사는 망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옷을 잘 사입는 다고 합니다. 산골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옷은 전혀 산골같지 않는 도시의 느낌이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갈망이나 투자, 그리고 국가 기간망인 철도나 도로 등에의 투자.. 1970년대의 한국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특히 민족간의 분쟁과 차별... 이러한 것들로 인한 사회 문화 발전의 저해는 앞으로도 그 해결이 쉽지 않을 듯 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워터, 머니”라며 다가서는 모습들... 한편으론 우리 부모들이 미국인들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섰으리란 생각에 한편으론 부모 세대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시간 정도의 진료가 끝난 후 일행은 모두 숙소로 돌아와 마지막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콜롬보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며칠이 지났지만 복구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곳곳에 장이 서고 물건을 파는 모습들도 눈에 띠었고 수도로 가까이 올수록 재해지역보다는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전체 피해자 27만명, 스리랑카 3만명.. 너무나 마음 아픈 숫자입니다... 새벽 한시... 콜롬보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이 시간에 떠납니다. 미국한인의료진 일행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며칠이지만 함께 지내며 정들었던 시간들...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도 많은 의료진과 의약품을 가지고 직접 도울 수 있게 되리라 소망하며 또한 비행시간만 24시간 이상 걸려 이곳까지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의료봉사를 하는 의료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 요즘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 중에 아주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해도 전혀 아쉬움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돕는 것이 훨씬 감사한 일”이라는 말... 한국의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제 세계를 향하여 사랑밭의 작은 사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일들이지만 머지않아 사랑밭 식구들과 함께 귀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함께 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요... 또 많은 도움 함께 참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많은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월드아가페 한국 02-2683-9300 미국 1-213-477-5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