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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구호현장상황

칠흑같은 공포의 밤, 당장 마실 물도 음식도..  

작성일 : 2015-04-29

비극의 카트만두

아리랑3호가 찍은 지진前後… 공터에 생긴 텐트촌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 3호’로 촬영한 네팔 카트만두 지진 피해 지역. 2013년 2월 9일에 촬영한 영상(위쪽 사진)과 27일에 촬영한 영상을 비교했다. 2013년 당시 공터였던 곳에 난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는 임시 구조물(점선 안)이 가득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원 등 도심 곳곳의 빈 공간에 임시 구조물이 설치된 모습도 확인됐다. 아리랑 3호가 촬영한 영상은 다른 나라 위성영상들과 함께 네팔에 무상으로 제공돼 피해 규모 산출 및 복구를 위해 사용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제공


  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인천공항을 떠난 지 30여 시간 만에 수차례 회항을 거듭하며 네팔 유일의 국제공항인 트리부반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27일 오후 6시였다.

피곤하고 지친 몸이었지만 무사히 착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으로 치면 지방의 철도 간이역처럼 낡고 허름했다.

짐을 찾으려고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기계는 멈춰 있었고 승객 짐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이러다 내 짐을 못 찾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 틈에 섞여 다른 짐들을 헤집은 끝에 1시간 만에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국제공항이란 곳은 으레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설렘의 장소이지만 이곳은 곳곳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과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연민과 함께 죽음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이젠 숙소가 걱정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 민박집을 예약하고 왔으나 계속 도착이 지연되면서 민박집 주인을 공항에서 기다리라고만 할 수 없어 예약을 취소했었다. 마침 한국인으로 보이는 60대 네 명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정말 반가웠다. 은퇴자들인데 3개월 전에 네팔 트레킹을 하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했다. 지진 소식을 듣긴 했지만 비행기가 뜬다고 하기에 출발을 강행했다고 한다. 여행이 힘들면 자원봉사라도 하자고 의기투합해 나선 길이라 했다. 기자가 “묵을 곳이 없다”고 하자 흔쾌히 자신들이 예약한 호텔로 함께 가자고 해 따라나섰다.

공항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승객들을 태우려는 운전사들만 북적였다. 호텔 가이드를 따라 낡은 일제 미쓰비시 자동차 짐칸에 몸과 짐을 실었다.

태어나 처음 와 본 카트만두는 거대한 암흑 도시였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주 오는 차의 헤드라이트에만 의지해 이동했다. 길가에 띄엄띄엄 불을 켠 상점들이 보였다. 운전 기사가 “미리 설치해 놓은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받는 몇 안 되는 곳들”이라고 서툰 영어로 일러주었다. 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다 왔다”고 해서 내렸더니 어두운 길가였다. 카트만두의 중심 지구인 타멜 지역이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다.

짐을 들고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도 없었다.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걸었다. 일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음산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6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투숙객은 많지 않아 보였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유럽 관광객 10여 명이 투숙하고 있다고 했다.

호텔이라고 해도 바깥 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단전(斷電) 단수(斷水)로 전기와 물을 일절 사용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도 불통이었다. 계단을 걸어올라 배정받은 4층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오갔다. 취재는 고사하고 이 도시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는데 호텔 직원이 초와 성냥을 가져다줬다. 촛불을 켜 놓고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 때문이었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깬 것은 침대가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여진이었다. 휴대전화를 켜니 28일 오전 4시였다.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닥칠 여진이 더 큰 문제라는 말을 언뜻 들었는데 이 호텔도 이러다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공포가 엄습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휴대전화가 불통이어서 누구와도 접속할 수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배터리가 거의 소진되고 있어 두려움은 더 커졌다. 이마저 끊기면 혼자 이곳에 방치되는 건가…. 바로 그때였다. 스위치를 켜 놓은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왔다는 생각에 재빨리 콘센트를 찾아 휴대전화 충전기부터 꽂았다. 그리고 1시간 만에 다시 전기가 나갔다.

뜬눈으로 2시간여를 보냈다. 바깥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오전 6시 호텔을 나섰다.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인데도 도로는 사람들로 넘쳤다. 몰골은 초췌하고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리엔 악취가 가득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집이 붕괴되어 아예 돌아갈 곳이 없거나 집 자체가 대부분 낡아 여진이 닥치면 그대로 묻힌다는 공포 때문에 나온 거였다. 길거리에 쓰러져 밤을 보낸 사람도 많아 보였다. 기둥만 남기고 사방 벽이 뻥 뚫린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간단한 음식을 먹는 가족도 심심찮게 보였다.

한 호텔은 땅이 푹 파였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옛 왕궁의 정문으로 보이는 건축물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붕괴된 초등학교도 눈에 들어왔다. “혹시 아이들이 죽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묻자 “다행히 지진이 난 날이 토요일이어서 희생자는 없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한 서양인에게 말을 걸었다.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글랜 팔리어 씨(67·여)는 은퇴 후 네팔에서 9개월째 여행자로 체류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인 중에 팔을 잃은 사람도 있다. 나도 여진이 두려워 길거리에서 잤다”고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휴대전화 문자 알림 신호가 울렸다. 반가운 마음에 보니 ‘오전 10시 18분 외교부. 네팔 여진 계속 발생. 체류 국민은 건물에서 떨어진 공터로 안전 대피 요망’이라는 문자였다. 현지 통신회사의 서비스 불능으로 문자메시지는 오고 갈 수 없었는데 아주 가끔 문자메시지가 배달되기도 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건물 붕괴에 따른 먼지 때문이다.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금방 목이 칼칼해졌다. 구정물로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330m²(약 100평) 정도 되는 도심 공터에는 대형 천막이 3, 4개 쳐져 있었다. 바로 옆 건물이 모두 붕괴돼서 모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무려 8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이틀을 먹고 자고 했다고 한다. 천막에는 아이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소피아 아차랴 씨(20·여·레스토랑 종업원)는 “지진이 나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며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도 전기도 없다. 막막하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데, 구호물자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머리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머리에 돌을 맞았는데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길을 계속 걷다 보니 텐트촌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카트만두 도심 전체가 대형 텐트촌 같아 보였다. 금융회사에서 일한다는 아르주 카드카 씨(21)는 “가족과 함께 천막에서 지내고 있다. 치안이 불안하지는 않지만 밤이 되면 무섭다. 어린이, 여자들도 공터에 방치돼 있어 크게 걱정된다”고 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온 것은 오후였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길거리에 있던 그 많은 사람이 이 비를 맞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외신들은 대지진 발생 나흘째인 28일 사망자가 5000명을 훌쩍 넘기고 부상자도 8000명을 넘겼다고 보도했다. 네팔과 인접한 인도와 중국에서도 각각 61명과 25명이 숨졌다. 현재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외곽 지역으로 구조 작업이 확대되면 사상자 수는 더 크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pen@donga.com

출처 : 동아일보